Rice in Blossom

For people whose dietary staple is rice, to eat cooked rice at least more than once is perhaps their daily routine. A series of photographic works under the title of Rice in Blossom is to capture not only the outer appearance of rice but also its social, psychological connotations. ● Through my first exhibit 『Trick』 I was intended to present the media of photography as a means for featuring everyday things in a significant or insignificant manner. In my second show 『Marionette』 the intent of my photographic creations was to reveal the presence of the enormous, yet invisible forces through everyday objects and scenes. ● An array of works in the exhibition 『Rice in Blossom』 continues to deepen my serial photograph 「Phantasma」 displayed in my second show. Through 「Phantasma」 I tried to capture the new meanings of the trivial objects I met while playing the role of a daughter, wife and daughter-in-law. Included among them was cooked rice. ● In 『Rice in Blossom』 my idea of the habitual practice of cooking rice in the kitchen, a specific place is photographically represented. The activity of cooking rice obligatorily or repetitively done for survival is distinctively expressed through the grains of boiled rice. In this process, the meaning of rice as a food, the scope of the family, the social implication of household chores, and the correlation between part and whole have been explored. ■ Bang Myung-joo








부뚜막꽃

쌀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면 매일 적어도 한번 이상은 누군가에 의해 눈앞에 차려지는 밥을 보게 될 것이다. 「부뚜막꽃」은 그 밥의 외양으로 시작하여 밥의 심리적 사회적 의미까지 사진의 힘을 빌어 포착하고자 한 작업이다. ● 나의 첫번째 사진전 『트릭』은 일상의 것을 의미있게 또는 무의미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비법으로서 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전 『마리오네트』는 삶을 조작하는 거대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다. ● 세번째 사진전인 『부뚜막꽃』은 두번째 사진전에서 선보인 「판타스마」연작을 심화시킨 것이다. 여성으로 지니게 되는 딸, 아내, 며느리 등 무시하지 못할 역할들 속에서 접하게 되는 사소한 사물들을 인공조명 위에서 새로운 의미로 포착해내는 작업이 「판타스마」였다. 그들 중에 ‘밥’이 있었다. ● 『부뚜막꽃』은 부엌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밥짓기에 대한 생각들을 사진작업으로 풀어놓은 것이다. 가족에 대한 의무감으로 또는 먹고살기 위한 반복행위로 매일 행해지는 밥짓기를 모아지고 흐트러지는 밥풀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신성한 먹거리로서 생존의 의미, 한솥밥 먹는 가족이라는 식구의 범위, 가사일이 갖는 사회적 의미, 밥과 밥풀처럼 얽혀진 전체와 개별의 관계 등을 생각하였다. ■ 방명주








주문(呪文)의 힘

들뢰즈가 글을 어렵게 쓴 것은 어찌됐건 질(質)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생활의 질적 차원이 담보되지 못할 때, 질의 차원에 대한 접근은 어려워 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 옛날 서양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보았듯 질적 차원은 불가지의 것인 것이고 그래서 이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판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니면 공리주의를 취하던가. ● 그런데 사실 지금으로선 ‘질’이란 개념 자체가 낯설다. 질로서 의미되는 것이 세계 그 자체인가 절대신인가? 질이란게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양적 특성이 아니라 질적 특성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라든가 질적 교환을 한다고 하는 게 중요한 일인가? 질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질감주의의 마지막 사치라면? 모더니즘은 아도르노의 사치로도 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 질에 대한 인식, 말하자면 물자체에 대한 인식은 사물이 나름대로 모두 질적 특성을 지닌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럴까? 질적 특성, 즉 진짜 특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믿음은 이미 너무 전형적인 양적 사고 혹은 산업주의적 사고의 치명적 오류 아닐까? 질의 숭고함이 차라리 불가지한 것으로 회피될 때, 질은 통속의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할 수 있으며 공공은 질적으로 교환되고 소통되는 가치지배를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공공을 위한 정원처럼. 어려운 얘기이다. 그렇다, 트랜스나 슈퍼, 메타 차원에서 파악되고 규정되는 질일 수밖에 없다면, 질적 의미의 교환, 즉 표리가 부동하지 않은 , 아니 좀 더 쉽게는 진짜로 진실한 소통이란 불가능한 논의이다. ● 질의 다양성이란 일종의 강령이나 기획 같은 개념의 것일 수 있다. 질적 차원의 존재를 먼저 인정해야하는 것이므로. 실은 특성이나 질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가치생성의 보증을 갈구하는 현단계 인류의 하나의 유아적 행태에 불과 할 수 있다. 여전히 씨족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족장 혹은 주술사가 있고 이들을 위한 부역노동자가 있으며 용맹한 무사와 아름다운 미녀가 역사를 낳는. 영웅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질은 영웅과 비극, 그래서 귀족의 가문과 그 성채를 보증한다. ● 오늘날 질을 재현한 것들로는 물건의 질적 특성이나 개성, 본성이라 불리는 바 그 특성들의 규명되지 않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인간의 필요 혹은 감각에 의해 가장 높은 차원, 귀한 차원 등 형용할 수 없는 차원을 구가한다고 느껴지는 재료의 특성이나 물질감 등이 있다. 이러한 류의 특성들에 대한 예찬이 기억되는 한 아트와 고급문화는 언제나 의미소통을 지배하는 주인기표일 수 밖에 없다. 서양미술사는 내면의 질이건 형상의 질이건 하이레벨의 질감을 구현한 업적의 기록이다. ● 칸딘스키, 말레비치 등은 정신의 세계를 점, 선, 면 등으로 표현했다. 그린버그도 회화성의 본질, 회화성의 질적 차원을 얻기 위해 회화적 질료세계를 우선 주목했다. 그래서 결국 회화의 질적 가치에 관한 구체적인 보증은 질감을 얻는데서 올 뿐인 것이 됐다. 질감에 대한 애착, 그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애니미즘을 대체한다. 종교와 신화가 됐다. ● 오늘날 뛰어난 질감을 구현하는데 목숨을 건건 오디오와 카메라 등의 영상기기 등이다. 아티스트는 질감을 선택하고 사용하는 능력이거나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질감을 발견하는 능력만 갖추어도 눈에 띈다. 아티스트는 아무데서나 이런 능력만 인정받으면 될 수 있다. 그래서 스타가 되면 머지않아 주술사가 된다. 역사는 변하지 않았다. 외양만 변했을 뿐이다. ● 현대미술 속의 대중문화는 혹은 대중문화와의 소통은 새로운 질감이 첨가되는 것 정도를 의미할 뿐이다. 새로움의 미학은 질감주의의 원래 갈 길이다. 비판적 리얼리스트도 질감판단을 위해 비판이 유일한 접근장치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들은 비판을 통해 질적 차원의 궁극을 열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질적 차원은 통속성 안에 존재했던 것이다. 어쨌건 이들도 질감주의자들이다. ● 좋은 질감(質感)은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통하는 만고의 가치이며 즐거움을 준다. 문학의 질적 차원은 늘상 가장 통속적인 삶의 질에서 나와 구원의 언어가 된다. 좋은 문학이 열어가는 질적 차원이 질감주의로 빠지는 일은 드물다. 시어가 여는 언어의미의 새로운 세계는 의미와 소통의 새로운 교환관계를 재현하거나 제시한다. 그리고 메타포는 인간과 자연의 비밀을 간직한다. ● 왜 모든 질적 차원은 그것이 얻어진 순간 의미의 중심이 되는 걸까? 질적 차원은 결국 성감대 같은 것일까? ● 사태나 사건의 의미가 드러날 때, 의미의 내용이란 사건의 실제의 질적 차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의 질적 차원은 언제나 진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내용을 얻었는데, 질적 차원 얻었는데도 사건의 의미가 진부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시어(詩語), 곧 문의 학(文의 學, 문학)이 됐을 때이다. ● 모든 기호는 기호인 순간 명령어가 된다. 질감주의의 기호는 질감을 구하라는 명령어로 작동한다. ●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했다는 설명처럼, 질적 차원을 보게 하는 것은 말씀의 예술을 통해서이다. 말은, 곧 일상의 인식이 통속성의 진짜 차원, 질적 차원을 보면 시가 된다. 시가 못되는 질감주의는 파시스트적이거나 색정적이다. 그런데 이보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실은 많은데 이런 것들은 모두 거울에 갇힌 환관들이다. 거울에 갇혀서도 권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갇혔기 때문에 즉 질감주의자가 되고픈 정열 때문에 환관이 됐기 때문이다. ● 보건대, 밥의 질이 밥풀일까? 밥과 밥풀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일치의 오리지널은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다. 밥은 추상명사, 밥풀은 구체명사일 것 같은데, 추상명사가 질을 대표할 수 있을까? 즉 국회가 국회의원의 질적 차원을 담보하느냐의 문제, 거꾸로 보자면 국회의원이 국회를 대표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여전히 공론으로 남아 있게 된다. ● 구체명사는 언제나 다양성을 재현하지만, 다양성이 이해(利害)의 다양성인 한 다양성은 모든 이해를 동등한 가치로 대한다는 회의(懷疑)를 안게 된다. 모든 이해가 동등한 걸까? 질적 차원의 내용을 불가지로 남겨두고, 질적 차원의 다양한 형식을 즐기는 습관은 교환가치를 사용가치와 동일하게 접대하는 교환의 오류와 동종의 오류이다. ● 표리가 부동하지 않는 어떤 교환이나 조건이 발생한다면 지배의 법칙도 달라질 것 같다. 밥이 밥풀인가? 밥이 밥풀은 아니다. 밥풀이 밥을 다 말할 수 있을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밥이 밥풀의 다양성을 다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말자면 밥에서 모자라는 것을 밥풀이 보태거나 밥풀에서 모자라는 것을 밥이 보태주지는 못할 것 같은데서 오는, 밥과 밥풀의 의미/차이는 질감주의와 당파성 사이에서 원래의 질적 차원을 소외시킨다. 밥의 당파성처럼 추상적이지도 않고, 즉 명령어가 아니며, 질감밥풀의 이해관계에도, 그들의 형태에도 함몰되지 않을 진짜 밥에 대한 의지는 시(詩)가 되어야만 대표성을, 미래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 강성원








부뚜막꽃_RICE IN BLOSSOM
Bang Myung-Joo Third Solo Exhibition / 2005_1012 ▶ 2005_1024
Opening Reception / 2005_1012_Wed._06:00pm

갤러리 쌈지_Gallery Ssamzie_www.ssamziegil.co.kr
B1F Ssamziegil Gwanhun-dong 38, Jongro-gu, Seoul, Korea / Tel. +82_2_736_0088